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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숙 칼럼] 장애의 벽을 넘어 보편적 교육으로

기사승인 2020.05.25  19: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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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숙 / 원광대 교수,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0대 국회에서 정치인들의 막말은 역대급이었다.
그 중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드러내 준 말을 상기해보자.
상대편 정치인을 일컬어 사용했던 용어들, “벙어리”, “절름발이”,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장애인이 아니다, 비뚤어진 마음과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장애인” 장애인은 마음과 생각이 비뚤어진 존재인가?

장애를 가졌다고 ‘을’이 되는 세상

말에는 사람의 생각과 철학이 베어 나온다. 더욱이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은 평소 생각의 깊이와 색깔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에는 그 시대상이 오롯이 담기기도 한다.
장애가 우리 사회의 인식 틀 안에서 ‘차이’가 아닌 ‘차별’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걱정이다.

어디 말 뿐이랴? 몇 년 전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은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가까운 곳에 특수교육기관이 부족하여 발달장애 학생이 통학을 하려니 하루 3시간이나 걸리는 어려움이 있었다.
학교 신설이 필요하여 정치인과 지역주민을 설득하기 위한 눈물겨운 호소였다. 장애를 지니면 왜 읊조리고 미안해야 하고, ‘을’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보통 사람들은 복지국가의 척도가 장애인을 고려한 복지체제뿐만 아니라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선진국이라 일컬을 때, 장애인에 대한 태도와 배려, 사회보장 정도를 그 척도로 삼기도 한다. 본 칼럼에서는 장애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 용어, 재개념화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고, 교육에서 통합교육과 포함교육 접근을 제시하고자 한다.

장애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

‘장애’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의존적이다? 불쌍하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 감사하다? 뭔가 도와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영화나 문학에서 접하는 장애에 대한 시선과 이미지는 어떠한가?

장애인 미디어 교육을 하는 미디액트에 의하면, 우리가 흔히 TV와 신문, 그리고 인터넷 등의 매체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는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묶어볼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장애 때문에 어려움과 비참함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시혜와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래서 시청자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둘째, 그런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이웃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삭막하지만 아직은 인간미가 살아 있는 살만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셋째, 그런 봉사에 의존하지 않고 장애인 개인의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장애인의 영웅담이 있다.

예를 들어,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지체장애인이 히말라야 산맥을 완주했다는 뉴스를 접하면 ‘극복’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 본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그 힘겨운 상황을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도전이라기보다 눈물겹고 처절하기까지 하다.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 장애를 바라봐주고, 장애로 인한 개별적 요구를 담담하게 수용해준다면 장애 자체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길 필요가 있었을까?
한 사람에게 장애 그 자체를 더불어 지니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해준다면 말이다.

결국 이런 시혜와 동정, 봉사, 극복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와 이미지가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바라보는 주류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이미지는 역으로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장애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강화시킨다.
평범한 이웃이기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은 뭔가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고 특별한 그 무엇이 된다.
나아가 우리가 외국인(특히 유색 외국인)을 대할 때 범하는 차별(Xenophobia)과 유사하게, 장애는 무능하고 불행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편견으로 발전하고, 많은 경우 결국 차별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불편하고, 능력이 없을 것이며, 그래서 불행할 것이라고 넘겨짚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편견의 일부일 뿐이다.
신체의 일부분을 활용해 철인 3종 경기에 과감히 도전하는 이도 있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우주의 역사를 밝히는 데 있어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한손에 두 개뿐인 손가락으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선사하는 이도 있다.

이제부터 ‘장애는 다른 것’으로 바라보자.
이상하고 일탈된 것이 아닌, 자신과 아주 정확하게 일치하는 외모와 성격, 습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허구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장애 그 자체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할 그 무엇이고, 다른 이와 차이가 있는 것, 즉 다른 것이다.

가령, 자폐성 장애의 경우 언어 사용에 문제가 있지만, 정보 처리를 위한 주요 방식으로 시각적 사고는 독특하고 뛰어나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직소 퍼즐을 풀어내고, 지하철 노선도를 쉽게 외우고, 맥락 대신 세부적인 사항에 집중하는 등 우뇌를 활용하는 기능이 차이가 있다. 영화 '내 이름은 칸'을 보면 화면에 제시된 직소를 한 눈에 맞춰버린다.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동물심리학 및 가축에 대한 인도주의적 사육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여 명성을 얻은 자폐성 장애 교수로, 선도적인 축산업 설비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림으로 생각하기(Thinking in Picture)’의 저자인 그녀는 시각적 이미지로 사고하여 소들이 왜 붉은 깃발과 그림자를 무서워하는지 알아낸다.
2005년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에서는 속일 줄 모르고, 순수하고, 바보스러우리만치 연습해서 완주하는 자폐성 장애인의 모습을 담아냈다.
최근 영화 ‘증인’에서도 자폐성 장애 학생 지우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독특한 면은 있지만, 동정이나 시혜를 베풀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장애’를 일컫는 용어들

장애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용어’에 형상화되는지 살펴보자.
비교적 오래된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장애를 비하하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벙어리 삼룡이, 백치 아다다, 귀머거리, 장님 등이 그렇다.
외국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handicap’은 ‘hand a cap’에서 온 단어로, 모자를 내밀고 구걸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이는 비장애 중심주의 개념과 더불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열등한 사람으로 저가치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차별적 대우를 받도록 하는 관념을 출현하게 했다.

‘자폐’, 최근에는 완곡어인 ‘발달장애’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자폐증’이란 용어는 어떤가?
소통이 안 되는 정치인을 일컬을 때 ‘자폐적(自閉)’이라는 말을 쓰곤 했다.
꽉 막히고 답답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다.
‘자폐’는 스스로 본인을 닫는다는 것이지만, 자폐성 장애인은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에 대한 기술이 부족한 것일 뿐, 관계나 상호작용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장애를 일컬을 때, 조금은 담담한 태도를 담았다. 가치를 개입하기(value-based)보다는 가치 중립적(value-free)으로 용어를 사용한다.
정신박약아에서 정신지체로, 10여 년 전부터는 지적장애로 호칭한다. 그리고 정신분열증은 조현병으로, 간질은 뇌전증으로 부른다.    

“장애우”라는 용어는 어떤가? 아마도 친근감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장애인이라면 ‘장애우’라는 용어를 써서 1인칭 주체화하기 어렵고, 3인칭으로만 지칭하기 때문에 본인이 장애인일 경우 문법적 오류가 발생한다.
장애를 가진 이를 대상화, 제3자화한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재고해봐야 한다.
장애를 제3자화하면 나 아닌 장애우는 나보다 못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고, 본인은 우월적 지위를 선점하는 좋은 기제가 작동된다.
장애는 ‘나’ 혹은 ‘우리’가 아닌 ‘그들’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용어의 사용과 관련하여 서구 사회에서는 60년대부터 “사람 먼저(People First)“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장애를 지닌 사람’이란 명칭을 사용할 때도 ‘피플 퍼스트’ 운동에 의해 장애를 사람 뒤에 써 ‘disabled People’이 아니라 ‘people with disability’라고 쓴다.
나아가 장애를 지칭할 때 개인의 결점이 아닌 하나의 개성으로 여기자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제는 장애계에서 자기 옹호를 통해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다르게 쓰기 시작했다.
뭔가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의미의 장애(disabilities)가 아닌, 다른 장점을 지닌 혹은 다른 능력이 있는(differently abled), 신체적으로 도전적인(physically challenged), 발달적으로 도전적인(developmentally challenged)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자기주도성을 지니고 주체적인 인간, 세금을 내며 자립하는 장애인의 이미지를 형성해가고 있다.    

장애에 대한 재개념화

‘인식’과 ‘용어’에 이어 장애에 대한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보자. 인류학자들은 보편주의 접근보다는 문화상대주의 입장을 선호한다.
다시 말해, 장애는 사회가 합의하여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본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장애를 이해하는 모델을 처음에는 의료적 원인에서 찾다가 사회적 지원 여부에 따라 장애를 입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장애 그 자체보다는 기능과 참여가 중요한 요인이라는 모델로 발전하고 있다.

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의료 진단과 처치의 대상으로 신체적 이상과 결손에 기인한다고 본다.
따라서 호의적으로 간주하게 되며, 호의는 불쌍함을 키웠고, 불쌍해진 사람은 여전히 부족한 존재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의료적 모델을 넘어 ‘사회적 모델’로의 전환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한 개인의 객관적 손상이 주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장벽들, 접근과 이동성이 보장되지 않은 건물 구조와 교통, 의사소통의 제한된 방식들, 편견 등이 장애를 사회에서 종속적 위치로 저가치화하는 데 작동한다고 보게 되었다.

장애의 발생은 ‘개인의 능력과 요구되는 숙련도 사이의 불일치, 개인에 대한 기대와 환경적 조건 간의 불일치’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런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 장애 이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결함이 장애에 대한 규준이 아니라, 개인의 가능성과 공동체 내의 사회적 참여 여부가 장애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질병과 손상은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장애인의 개인적 문제 상황 및 환경적(맥락적) 요인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지에 따라 다르게 작동되며, 사회적 참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애’는 질병과 같이 치료나 죽음에 의해 종료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극복되는 그 무엇이 아니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일부이다.
장애학(disability studies)적 관점에서 장애를 수용하면 장애는 이상한 것이 아니고, 그저 다른 그 무엇일 뿐이다.
이상성을 부각하여 차별하기보다 보편성에 기반을 두고 ‘차이와 다양성’의 렌즈로 바라보자.

보편적이고 포함하는 교육이 특별한 도전이 되지 않도록!

이제 우리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도 소박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열어가야 한다.
장애가 없었으면 다녔을,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다니는 것이 장애 학생에게 더 이상은 특별한 도전이 되지 않아야 한다.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숨은 잠재력이 더 이상 묻혀 버리지 않도록, 미래의 꿈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보편주의 포용적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 있다.     

유엔이 발간한 “장애와 지속가능 발전 목표에 대한 유엔보고서(2018.12)”의 교육 분야 내용에는 장애인이 가난과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필수 조건으로 교육권을 ‘지속가능 발전’ 달성의 중요한 기초라고 강조하였다.
비장애인과 함께 공부하고, 또래와 함께 학교와 집을 오가고, 교실에서 필요한 인적·기술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만을 위한 교육시설이나 교실과 같이 분리교육을 진행하기 보다는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장애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장애로 인한 개별적 요구에 맞도록 사회에서 지원을 해주면 모두가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WHO의 ‘사회적 모델’처럼 사회에서 장애를 수용하지 못해서, 장애로 살아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통합교육, 포함교육이란 장애 학생도 일반 학생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반 학급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매우 다양하다. 일반 공립학교라도 한 학급의 구성원은 동질 집단이 아닌 이질 집단에 가깝다.
그러므로 인종, 민족, 가족 구성원, 사회·경제적 계층, 성 정체성, 능력, 외모 등을 포함한 다양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장애를 비롯해서 점차 확대되는 개인의 다양성 수용과 관련된 쟁점을 심각하게 논의해야 한다.
교사가 장애 아동을 통합하기 위해 교육을 설계하고 실행하면, 일반 학급에서 함께 교육받는 다양한 어려움을 지닌 아동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런 맥락에서 OECD에서는 특수교육 요구 아동으로 SENDDD(Special Education Needs Disability, Difficulties, Disadvantages)라 명하여 특수교육 요구를 지닌 아동으로 단지 장애를 지닌 아동(disabilities) 만이 아니라 학습이나 정서에 어려움을 지닌 아동(difficulties)과 여러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아동(disadvantages)들을 포함하였다.

장애뿐만 아니라 불이익을 받는 학생들을 포함하는 방법으로 ‘보편적 학습 설계(universal Design Learning: UDL)’를 통한 교육을 하면 다문화 가정 아동, 기초 학습 부진아 등을 모두 함께 품어 안을 수 있다.
학습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미지나 음성 지원, 글자 크기 조절, 텍스트나 디지털북 등 다양한 매체나 자료를 제시하는 것, 다양한 문제를 제공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게 하는 것, 학생이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용이한 참여 수단을 제공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내용과 방법을 보완하여 유연성 있게 접근하면, 장애 학생들뿐만 아니라 특별한 교육적 요구를 지닌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더 심화될 수 있을 교육의 소외와 격차를 좀 더 좁힐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차별 언어를 사용하고 차별 행위를 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날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 [강경숙 칼럼]은 프레시안과 공동 게재합니다.

시사코리아저널 webmaster@koreajn.co.kr

<저작권자 © 시사코리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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