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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혜숙 칼럼] 착시 개혁의 덫, 농산물 유통개혁은 어디로

기사승인 2025.09.23  15: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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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혜숙 /전)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전문위원

# 유통구조 개선안의 실상

지난 9월 15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새로운 농수산물 유통구조 개선안을 내놓았다. 
핵심은 2030년까지 온라인도매시장을 전체 도매유통의 50%까지 확대하고, 거래 규모 20억 원 이상 요건을 없애 누구나 온라인 플랫폼에서 농수산물을 거래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예약형 정가거래를 활성화하고, 경매·역경매, 다품목·소량 거래 기능을 추가하며, 스마트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를 300개소까지 확충해 AI 기반의 생산·유통 정보 분석 체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소비지 단계에서는 청년농과 온라인 전문 셀러를 육성하고, 맞춤형 물류비 바우처를 제공해 새로운 주체를 시장에 참여시키겠다고 강조했다.

표면적으로는 디지털 전환과 주체 다변화가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내용은 불과 1년 전 윤석열 정부가 발표했던 유통구조 개선안과 놀라울 만큼 닮았다. 
당시 정부는 거래 품목 확대, 판매자 가입 기준 완화(50억 원 → 20억 원), 판·구매자 병행 허용, 스마트 APC 100개소 조기 구축, 물류기기 시장 경쟁 확대 등을 내세웠다. 소비지 단계에서는 무포장(벌크) 유통 확산과 온라인 플랫폼 간 경쟁을 통한 수수료 인하를 추진했다. 
전반적으로 경쟁 촉진과 비용 절감을 앞세운 구조였다.

이번에 발표된 안은 이 뼈대 위에 디지털 기술과 민생 프레임을 덧칠한 수준에 가깝다. 
윤석열 정부가 효율화와 경쟁 촉진을 강조했다면, 이재명 정부는 기후플레이션과 민생 안정을 전면에 내세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질적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도매법인 중심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온라인 거래와 예약형 정가·수의거래 확대만을 해법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 무엇이 문제인가

실질적 경쟁 주체 다변화는 빠져 있다. 예컨대 중도매인에게 정가·수의거래를 허용하거나, 각 지역 공영도매시장을 기반으로 분권형 온라인 플랫폼을 활성화하는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농민과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개혁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는 “7조 원 거래, 유통비용 10% 절감, 가격 변동성 50% 완화”라는 화려한 목표를 내세우며 개혁에 속도가 붙는 듯 홍보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착시 개혁’의 그림자가 짙다.

현실적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2024년 온라인도매시장 거래액은 6,737억 원에 불과하다. 
이를 2030년까지 7조 원으로 늘리려면 연평균 48%라는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단순히 판매자 가입 기준을 낮추거나 물류비를 지원하는 인센티브만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신선 농산물은 저장성이 낮고 운송 안정성이 떨어지며, 손실률이 높은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거래량이 급격히 늘어나면 파손·반품 비용이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전국 권역별 공동물류센터, 저온저장고, 자동화 분류시스템 같은 인프라 확충과 함께 공공급식·대형 소매업체 등 안정적 수요처의 온라인 참여가 병행돼야만 목표에 접근할 수 있다.

유통비용 10% 절감도 구조적 과제를 남긴다. 
정부는 이미 온라인 거래를 통해 도매 단계 일부에서 7.4%의 절감 효과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물류비 지원, 공동선별비 가산 등 인센티브에 크게 의존한 결과다. 
남은 2.6%포인트를 줄이려면 단순한 온라인화가 아니라 비용 구조 자체를 손봐야 한다. 
포장재 표준화, 공동배송 확대, 자동화 하역, 감모율·폐기율 절감 같은 전방위적 개선이 필요하다. 
인건비와 에너지 비용은 온라인 전환만으로는 줄지 않기 때문에, 물류·작업 효율화를 체계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격 변동성 50% 완화라는 목표는 더욱 이루기 어렵다. 
정부 설명대로 기후재해, 재배면적 변화, 병해충 발생 같은 생산 단계 요인이 가격을 흔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단기 변동성이 전국적으로 증폭·확산되는 구조다. 
가락시장 경매가격이 전국 농산물 거래의 기준가격으로 작동하면서, 단기 수급 불균형이 과도하게 과장되고 가격 급등락이 전국으로 전이되는 메커니즘이 고착화되어 있다.

따라서 온라인화·예약거래 확대만으로는 근본적 안정 효과를 담보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기준가격 체계의 전환이다. 
지금처럼 가락시장 경매가격 하나에 의존하는 방식을 넘어, 강서시장처럼 시장도매인의 실거래 가격, 생산비를 반영한 원가 기준, 대형 유통업체 직거래 가격 등이 함께 기준점으로 작동하는 복수 기준가격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기준을 다변화해야만 시장 전체의 변동성을 낮추고, 농가와 소비자 모두 체감할 수 있는 가격 안정이 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도매법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예약형 정가·수의거래를 중도매인에게도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도매법인 독점 구조가 깨지고, 농민과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가격 경쟁이 가능하다. 

또한 가락시장에도 경매제와 경쟁하는 시장도매인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유통 주체 간 경쟁을 넘어 거래제도 자체의 경쟁을 유도하는 장치다. 
경매와 직거래 제도가 공존하며 서로 견제·보완을 이룰 때, 비로소 실질적인 경쟁 효과가 발생한다. 
이러한 구조 전환이 이루어져야만 농산물 가격 급등락을 완화하고, 농가 소득 안정과 소비자 물가 안정이 동시에 가능하다.

결국 농산물 유통개혁은 단순히 ‘디지털화’ 지표로 포장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경쟁 구조와 제도 체계를 바꾸는 근본적 개혁이다. 
농민의 가격결정권 회복, 소비자의 부담 완화, 유통구조의 투명화라는 본질적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개혁은 또 한 번의 착시 개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 농산물 유통개혁의 본질

바로 이 지점에서 농산물 유통개혁은 전면적 시스템 개혁임이 드러난다. 
개혁은 거래 방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경제·사회·문화·기술·환경·제도·보건·국제·교육 등 아홉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인 파급효과를 낳는다. 
가격과 소득 안정, 신뢰와 균형 발전, 윤리적 소비 문화, 데이터 기반 가격 예측, 탄소 절감과 지속가능성, 법·제도 재편, 국민 건강, 수출 경쟁력, 인재 혁신까지 유통개혁은 사실상 종합 사회개혁의 성격을 지닌다.

유통개혁은 곧 민생경제 안정장치다. 
경매 의존을 줄이고 계약재배와 정가·수의거래를 확대하면, 농가는 원가를 반영한 가격을 보장받고, 소비자는 급등락 없는 합리적 가격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서민의 장바구니와 농민의 지갑을 동시에 지키는 경제정책이다. 

유통개혁은 또한 사회적 신뢰 회복으로 이어진다. 
가격과 수수료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지방 도매시장을 활성화하면 불신과 불안을 끊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끌 수 있다. 
소비문화도 바뀐다. 싼값만 좇는 문화를 넘어 로컬푸드, 못난이 농산물 활용, 윤리적 소비로 전환될 수 있다.

기술·환경·제도의 혁신도 유통개혁의 영역이다. 
AI와 데이터 기반 수급 관리, 블록체인과 IoT는 가격 예측과 품질 보증을 가능하게 한다. 
물류 효율화와 계약재배 확대는 탄소 감축과 폐기물 감소로 이어진다. 
따라서 유통개혁은 곧 기후대응 전략이기도 하다. 물류 단계를 줄이면 탄소발자국이 감소하고, 계약재배는 과잉 생산과 폐기를 막는다. 
AI 기반 수급관리는 가뭄·폭우 같은 기후 충격을 완화하고, 순환형 포장재와 재사용 물류 시스템은 자원 낭비를 줄인다. 
환경 부담을 줄이면서도 비용을 절감하는 이중 효과가 가능하다.

법·제도의 개혁도 필수적이다. 
「농안법」 개정, 시장도매인 제도 도입, 중도매인 정가·수의거래 허용, 수수료 상한제는 기득권 독점을 깨는 제도적 장치다. 

생산자·소비자·지자체가 참여하는 거버넌스는 공정성과 민주성을 높인다. 
안정된 가격은 공공급식과 저소득층 먹거리 기본권 보장을 가능하게 하고, 표준화된 규격과 콜드체인은 한국 농산물의 수출 신뢰도를 높인다. 

무엇보다 개혁은 사람으로 완성된다. 
데이터 분석가, 콜드체인 엔지니어, 푸드 디자이너, 기후밥상디자이너 같은 신직업군을 창출하고 육성해야 한다. 
새로운 일자리는 청년 세대의 진입로를 넓히며, 소비자 교육은 윤리적 소비 시민까지 키운다.

종합하자면, 농산물 유통개혁은 단순한 시장 효율화를 넘어 경제 안정, 사회 신뢰, 문화 성숙, 기술 혁신, 환경 지속가능성, 제도 재편, 국민 건강, 국제 경쟁력, 인재 양성의 아홉 갈래 효과를 동시에 열어젖힌다. 
이 효과들은 따로 움직이지 않고 맞물려 돌아간다. 유기적인 톱니바퀴다. 
기술은 가격을 안정시키고, 환경은 비용을 줄이며, 제도는 신뢰를 세우고, 교육은 미래를 준비한다. 
바로 이때, 유통개혁은 국민이 체감하는 개혁이자, 한국 사회 전체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종합 사회개혁으로 완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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