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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호 /정치학 박사,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
# 국가가 폭주하는 위기의 시대
지금의 국제 정세는 ‘국가의 귀환(歸還)’을 넘어 ‘국가의 폭주(暴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한때 국가의 공동화 또는 소멸론까지 등장했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반전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 대립과 경쟁을 확대하는 가운데, 인류의 평화적 공존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MAGA)는 동맹 간의 신뢰마저 무력화시키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 또한 자원과 군사력을 앞세워 영향력을 확대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21세기의 ‘문명화된 사회’에 대한 꿈을 여지없이 뭉개버리고 있다.
국가가 폭주하는 가운데 기후 위기, 팬데믹, 사이버 안보, 인공지능 등 초국가적 문제들에 대한 국가 간 협력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인류 공동의 미래를 위해 서로 손잡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협력과 연대보다는 경쟁과 갈등이 현실을 지배하면서 인류가 쌓아온 보편적 가치와 신뢰마저 허물어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국가가 문제투성이라고 해서 이를 외면하거나 비켜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정치제도 중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다.
그만큼 시장과 시민사회로는 대신할 수 없는 국가가 가진 특성과 역할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총체적 위기 상황을 맞아 국가가 가진 법·제도적, 재정적 역량을 적극 활용하여 바람직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마치 미친 말의 고삐를 단단히 부여잡듯이, 국가의 힘을 폭주가 아니라 전환의 방향으로 되돌리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 지속가능성 위기와 전환적 국가 역할
오늘날 국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후 문제를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성 위기다.
경제-사회-생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지속가능성 위기는 국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와 안전, 복지, 행복 보장을 통한 국가의 정당화 논리 자체를 밑바닥부터 흔들고 있다.
그만큼 지속가능성 위기에 대한 효과적 대응과 해결을 위한 국가의 전환적 역할은 핵심 과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국가의 전환적 역할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바로 ‘복지국가’다.
이 모델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지속가능성 위기를 국가가 가진 재분배 역할을 적극 활용하여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지금 당면하고 있는 지속가능성 위기는 이보다 더 복잡하고 까다롭다.
복지국가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던 경제가 저성장 국면으로 바뀌면서, 시장경제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 거둬들인 세수에 크게 의존하던 복지국가 모델은 부채 증가와 재정적 위기 속에서 지속 불가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기에다 기후 위기 등 생태적 차원의 지속가능성 위기가 전면화되면서, 시장에서 생산된 부를 공정한 기준에 따라 재분배하는 복지국가의 자애로운 역할을 기대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속가능성의 총체적 위기로부터 전환의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 내는 국가의 역할로서 ‘녹색국가’가 주목받고 있다.
녹색국가는 법과 제도를 활용한 자원의 조달·할당·분배와 생산과 소비의 규제, 공동 자원 보호, 민주적 과정을 통한 집단행동 조율 등을 통해 경제-사회-자연의 관계를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재조정하는 것을 핵심 역할로 한다.
따라서 녹색국가는 환경친화적 정부나 환경국가의 차원을 넘어선 개념이다.
그리고 녹색국가 관점에서 복지국가 모델 또한 승계의 대상이 아닌 전환과 극복의 과제로 다뤄질 필요가 있다.
# 복지국가와 녹색국가의 관계 탐색
복지국가와 녹색국가 사이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만큼 상호 관계 또한 복잡하다.
우선, 녹색국가는 여타의 국가 모델에 비해 복지국가와의 친화성이 높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녹색국가와 복지국가 모두 이윤 추구와 상품화 논리를 앞세운 시장의 부정적 외부효과를 감소시키는데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 국가 보다 국가의 시장 개입에 대한 거부감 또한 상대적으로 적어서, 정책 결정에 따른 사회적 부담에 대해 시민들의 동의와 수용 가능성이 더 높다.
여기에다 시민사회의 요구에 국가가 보다 더 책임 있게 반응하는 것도 공통된 특성이다.
이런 배경으로 자유주의 국가보다 복지국가가 녹색국가로의 전환에 더 유리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실제로 많은 녹색국가 담론이 서구의 선진적 복지국가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복지국가와 녹색국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복지국가는 성장을 전제로 불평등을 다루는 반면, 녹색국가는 성장 자체가 낳는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또한 복지국가는 주로 국내적 과제를 다루지만, 녹색국가는 기후위기와 같은 전 지구적 과제에 응답해야 한다.
이러한 차이는 복지국가가 곧바로 녹색국가로 전환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녹색국가를 북유럽 선진 복지국가에서 진화한 모델로 제한해서 봐서도 안될 일이다.
현재 195개국 중 3/4이 넘는 약 160개국은 보편적 복지 시스템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인데, 복지국가를 거쳐 녹색국가로 가는 것으로 보는 단계론적 사고는 지속가능성 위기의 임계점을 앞둔 시간적 한계 상황에서 적절치 않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개발국가 유산의 영향이 여전히 강력한 가운데 경제 규모에 비해 복지 수준이 미약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녹색국가를 모색해 가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지속가능성 위기 상황에서 ‘생태’와 ‘복지’라는 이중적 과제를 함께 고민하면서 국가의 전환적 역할을 새롭게 찾는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 녹색국가의 복지 인식과 ‘생태복지’ 모델
복지국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안정성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복지는 단순한 소득 재분배의 기능을 넘어 미래를 위한 전략적 자원 배분과 재난 상황 대비, 그리고 전환의 동력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복지 문제 또한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안정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방향에서 ‘생태복지’ 문제를 적극 다뤄나갈 필요가 있다.
기존의 복지적 접근을 환경 생태적 영역으로 확장한 것과 생태복지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생태적 한계를 무시한 복지는 결국 지속될 수 없고, 사회적 최저선을 지키지 못하는 전환은 시민의 동의와 지지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건강한 환경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복지의 대안적 역할, 대안적 복지로서 생태복지 역할이 중요하다.
그만큼 모든 사람이 건강한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준의 의식주 제공은 생태복지의 기본이 된다.
여기서 의식주는 의료(醫), 먹거리(食), 주거(住)를 말한다.
또한 생태복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현재와 미래세대 간의 관계의 질을 중시한다.
이는 복지를 단순히 ‘결핍 해소형 서비스’가 아니라 ‘관계 기반의 삶의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관련해서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와 국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확인시켜줬다.
팬데믹을 통해 개인의 건강은 공동체의 회복력과 직결되었고, 확장된 돌봄과 연대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았다.
생태복지는 바로 이런 경험을 제도화하고 사회 전환의 동력으로 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 생태복지 실현을 위한 과제와 방향
생태복지를 위해서는 국가복지에서 시민복지로의 확장이 필요하다.
기존 복지모델이 소득 재분배를 통해 ‘아래에 있는 이’를 돌보는 것이었다면, 시민복지는 ‘바깥에 있는 이’를 향하는 것으로, 생존의 권리를 넘어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 사회 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계적 존재로서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시민복지의 문제 인식을 이웃은 물론 미래세대와 비인간 존재까지 확장하는 것이 생태복지다.
시민복지가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안전망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시민 스스로 복지의 생산과 이용, 제공 과정에 참여하고 결정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생태복지는 상호부조와 돌봄의 연결망을 삶의 동반자이자 생명공동체의 구성원 전반으로 더욱 확장시켜 내는 것이 과제다.
이러한 생태복지는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통한 지역자립과 순환 체계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복지 영역 전반을 국가가 책임지고 공급하는 모델이 오히려 공동체적 관계와 자급 및 자치력을 약화시킨 반면, 복지 수요를 시장을 통해 상품으로 구입하는 모델은 오히려 불평등성을 확대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그만큼 복지 문제를 지역사회의 통합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망을 통해 해결하는 것은 생태복지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지역 자원의 외부 유출을 줄이고 지역 내에서 순환하도록 함으로써 자립 기반을 높이는 노력은 생태복지가 강조하는 지역 자립과 순환을 통한 회복탄력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녹색 전환의 거점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하다.
또한 생태복지 실현에 있어 국가의 재분배 역할이 새롭게 설정될 필요가 있다.
복지와 관련한 제도와 인프라 조성, 상호 관계망 복원 및 활성화, 참여와 자립·자치 역량 강화, 사회-생태적 회복탄력성 향상과 지속가능성 실현 등이 생태복지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재분배를 통한 탈상품화의 가능성이 확장될 때 세대 내 불평등은 물론 세대 간 불평등과 생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녹색 전환도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 국가의 책무와 헌법적 과제
지속가능성 위기를 해결하고 생태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전환적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가는 재분배와 자원 배분 역할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고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핵심 역할자다.
국가를 통해 공공 서비스와 사회보장 시스템이 강화될 때 시민들은 비로소 자본주의적 상품 관계에 덜 의존하게 되고 지속가능한 삶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찾아가게 된다.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생태와 복지의 이중적 과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결하는 역할자로서 녹색국가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녹색국가는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가는 문턱을 낮추고, 전환에 따른 부담과 저항을 줄이고, 전환에 필요한 자원을 체계적으로 조성해 전략적으로 배분하고, 다양한 전환의 영역을 보호·육성·확산하고, 유기적으로 연계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것을 주요 역할로 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지속가능성 위기 시대에 걸맞은 합의된 국가 발전 모델과 전략이 아직 없다.
개발국가, 복지국가, 경쟁국가 논의가 혼재된 상태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국가 역할은 불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정책은 연속성을 가지기 어렵고, 장기적 관점에서 사전예방적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정부 역할에 대한 평가나 선거를 통한 책임 묻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후 문제를 비롯한 지속가능성 위기 시대에 대응하는 총체적 전환의 절실한 과제가 제대로 다뤄지기 어렵다.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사회계약으로서 생태복지와 국가의 전환적 역할이 제대로 다뤄져야 할 때다.
이런 관점에서 지속가능성 위기 상황에 걸맞게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차원으로 헌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
헌법은 해당 국가의 최상위 규범으로, 국가 운영 체계와 방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마침 비상계엄이 초래한 혼란한 사태를 뚫고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담은 개헌 논의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렵고도 중요한 시기인 만큼, 개헌이 단순한 권력구조 개편에 머물지 않고, 생태와 복지를 헌법적 가치로 명문화하고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가의 책무를 새롭게 규정하는 방향으로 국민 참여적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 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저서로 《녹색국가: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한 이론과 전략》(단독), 《호모 쿠란스: 돌보는 인간이 온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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