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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한국ESG경영인증원 수석전문위원 아리부엌양조 대표 음식연구가 · 로컬 창업가 |
40년의 시간을 품은 채 한동안 멈춰 있던 공간에 다시 불을 켰다. 오래된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집이었지만, 버려진 공간에도 새로운 쓰임을 더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씩 손을 보태기 시작했다.
음식이 만들어지고 술이 빚어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다시 이어졌다. 누군가는 막걸리를 마시러 왔고, 누군가는 음식을 맛보기 위해 찾아왔으며, 또 누군가는 오래된 공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 궁금해 찾아왔다.
한동안 비어 있던 공간에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고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졌다. 공간을 되살리는 일은 결국 그 안에 다시 사람을 불러들이고 지역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일이었다.
막걸리를 빚으면서 한 병의 술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간이 연결되어 있는지도 알게 됐다.
쌀을 생산하는 농부의 시간이 있고, 재료를 준비하고 술을 빚는 사람의 손길이 있으며, 병과 포장재를 공급하고 완성된 술을 전달하는 과정이 있다.
마지막에는 그 술을 선택하는 고객이 있다. 한 병의 막걸리는 양조장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안에는 농업과 생산, 유통과 소비, 그리고 사람과 지역의 관계가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지역의 재료를 선택하는 일도 단순한 원료 구매로 바라볼 수 없게 됐다.
좋은 품질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누가 생산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그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까지 살피게 된다.
지역에서 생산된 재료가 음식과 술로 다시 태어나고 그 가치가 지역 안에서 이어진다면 한 병의 술도 지역경제의 작은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양조장에서 매일 마주하는 생산 과정 역시 다시 보게 됐다. 술을 빚으면 지게미가 남고 물과 전기가 필요하며 병과 포장재가 사용된다.
당연하게 지나쳤던 과정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줄이거나 다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인다.
사용하는 자원을 돌아보고 버려지는 것을 줄이며 남은 것을 새로운 쓰임으로 연결하는 일은 거창한 계획보다 일상의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ESG는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환경을 생각하는 일은 우리가 사용하는 자원을 돌아보는 데서 시작되고, 사회적 책임은 함께 일하는 사람과 농가, 협력업체와 고객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약속을 지키고 기준을 세우며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잡는 과정은 책임 있는 운영으로 이어진다. 결국 ESG는 별도의 업무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운영하는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지역의 축제를 만나는 과정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감옥페스타와 석탄문화제, 산나물축제, 소설주막 등 여러 현장에서 지역의 음식과 술을 소개하면서 축제가 단순한 판매의 자리를 넘어 지역의 이야기를 전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지역의 재료가 음식과 술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지역을 바라보게 되면서 하나의 상품이 지역을 알리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현장의 경험은 기록으로 남길 때 다음으로 이어진다.
양조는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더라도 원료의 상태와 날씨, 온도와 발효 과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오랜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지만 사람의 기억만으로 모든 과정을 이어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날 사용한 원료와 제조 과정, 발효 상태와 관리 내용, 문제가 있었던 부분을 남겨두면 지난 경험이 다음 선택의 기준이 된다.
손맛은 기억으로 남지만, 기록된 손맛은 기준이 된다.
기록은 과거를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잘된 과정은 이어가고 부족했던 부분은 고치며,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한 사람의 경험이 기록을 통해 다음 사람에게 전달되면 개인의 손맛은 양조장의 자산으로 바뀐다.
아리부엌양조의 ESG도 아직 진행형이다. 이미 실천하고 있는 일도 있고 더 체계적으로 이어가야 할 일도 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시작한 것이 아니듯 앞으로도 하나씩 배우고 고쳐가며 기준을 만들어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잘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과 생산 현장에서 변화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오랜시간동안 꺼져있던 공간을 다시 살린 일도 거창한 계획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오래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고 하나씩 손을 보면서 새로운 쓰임을 찾았다.
그 결과 그곳에서 음식이 만들어지고 술이 빚어졌으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 됐다. 지금도 그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지속가능성 역시 특별한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공간을 다시 사용하고, 지역의 재료를 선택하고, 함께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생산 과정에서 남는 것을 다시 살피고, 오늘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처럼 일상에서 반복되는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
40년 동안 꺼져 있던 불을 다시 켠 것은 공간 하나를 되살린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불빛 아래에서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만들고 술을 빚으면서 공간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불빛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좋은 막걸리를 빚는 데는 손맛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나은 막걸리를 계속 빚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하다.
오늘의 경험을 남기고 내일의 기준으로 이어가는 과정이 결국 아리부엌양조가 만들어갈 지속가능성의 바탕이 될 것이다.
버려진 공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지역의 재료로 술과 음식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 그 과정에서 쌓이는 작은 변화들이 지역의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40년 꺼진 불을 다시 켠 아리부엌양조. 이제 그 불빛이 사람과 지역을 잇는 오래된 등불처럼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선우 기자 lsw102424@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