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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은 민족반역자 아닌가?

기사승인 2010.02.11  0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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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시는 민족반역자 부여융의 가묘를 당장 파묘하라!

(편집자 주) 백제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은 공주성주 예식진의 반역행위로 의자왕과 함께 사로잡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인계되어 백제는 망하게 된다.

당나라로 끌려간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에 항복한 뒤 웅진도독부대방군왕(熊津都督府帶方郡王)을 제수 받고는 조국인 백제의 부흥운동을 무산시킨 인물이다.

662년 7월 당나라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가서 백제의 복신(福信), 부여풍(扶餘豊) 등이 부흥운동을 벌이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하여 평정한 후 당나라로 돌아간다.

또한 당나라 장수 유인궤의 주선으로 백제를 망하게 한 신라왕과 만나 백마의 피로 맹세하는 의식까지 치르고, 백제부흥군의 주역인 흑치상지를 설득해 당나라에 항복하게 만든다.


이로서 그의 조국 백제는 부흥의 꿈을 완전히 접고 망할 수 밖에 없었다. 즉 부여융은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얼빠진 인간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런 민족반역자를 기리답시고 충남 부여시는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를 만들어 그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부여융은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죄가 크거늘, 마치 그를 위대한 일을 한 인물로 그 공적을 치하하고 있다. 다 이 나라 역사교육이 잘못된 결과일 것이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민족반역자들은 살아서는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죽어서도 후손들에게 그 공적(?)을 치하받고, 나라를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열사는 살아서는 가시밭 길이요, 죽어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제사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신세이다.

▲ 부여시가 의자왕과 함께 조성한 부여융의 가묘. 부여융은 민족반역자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묘를 만들어 추앙하면 안된다. 부여시는 민족반역을 조장하고 있나? 당장 부여융의 묘지를 파묘하라!


아래는 중국 하남성 낙양에서 발견된 민족반역자 부여융의 묘지명이다.
당나라의 개로 살아 그 내용이 구역질나지만 아래와 같이 내용을 소개한다.

扶餘隆墓誌銘
公諱隆字隆百濟辰朝人也元□□孫啓祚暘谷稱雄割據一方跨躡」
▲ 중국 하남성 낙양시박물관에 있는 부여융묘지명

千載仁厚成俗光揚漢史忠孝立名昭彰晉策祖璋百濟國王沖撝淸」
秀器業不羣貞觀年詔授開府儀同三司柱國帶方郡王父義慈
顯慶年授金紫光祿大夫衛尉卿果斷沈深聲芳獨劭趨藁街而沐」
化績著來王登棘署以開榮慶流遺胤公幼彰奇表夙挺瓌姿氣蓋三」
韓名馳兩貊孝以成性愼以立身擇善而行聞義能徙不師蒙衛而□」
發慙工未學孫吳而六奇閒出顯慶之始王師有征公遠鑒天人深知」
逆順奉珍委命削衽歸仁去後夫之凶革先迷之失款誠押至襃賞荐」
加位在列卿榮貫蕃國而馬韓餘燼狼心不悛鴟張遼海之濱蟻結丸」
山之域皇赫斯怒天兵耀威上將擁旄中權奉律呑噬之筭雖」
稟廟謀綏撫之方且資人懿以公爲熊津都督封百濟郡公仍」
熊津道摠管兼馬韓道安撫大使公信勇早孚威懷素洽招攜邑落」
忽若拾遺翦滅姦匈有均沃雪尋奉明詔脩好新羅俄沐」
鴻恩陪覲東岳勳庸累著寵命日隆遷祑太常卿封王帶方郡公事君」
竭力徇節亡私屢獻勤誠得留宿衛比之秦室則由余謝美方之漢朝」
日磾慙德雖情深匪懈而美疢維幾砭藥罕徵舟壑潛徙春秋六十」
有八薨于私第贈以輔國大將軍諡曰公植操堅慤持身謹正高」
情獨詣遠量不羈雅好文詞尤翫經籍慕賢才如不及比聲利於遊塵」
天不憖遺人斯胥悼以永淳元年歲次壬午十二月庚寅朔卄四日癸酉」
葬于北芒淸善里禮也司存有職敢作銘云」
海隅開族河孫效祥崇基峻峙遠派靈長家聲克嗣代業逾昌澤流㴲」
水威稜帶方餘慶不孤英才繼踵執尒貞慤載其忠勇徇國身輕亡家」
義重迺遵王會遂膺天寵桂婁初擾遼川不寧薄言攜育寔賴」
威靈信以成紀仁以爲經宣風徼塞侍蹕云亭爵超五等班參九列虔」
奉天階肅恭臣節南山匪固東流遽閱敢託明旌式昭鴻烈」
大唐故光祿大夫行太常卿使持節熊津都督帶方郡王扶餘君墓誌」


부여융묘지명 번역
공(公)은 이름이 융(隆)이고 자(字)도 융(隆)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다. 시조는 하백(河伯)의?) 자손이니
그가 처음 나라를 열어 동방에서 우두머리로 일컬었고, 한 쪽 귀퉁이를 차지하여 천 년 동안 이어내려 왔다. 어질고 후덕함이 풍속을 이루어 한(漢)나라 역사에서 빛을 발하였고,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을 날리니 진(晋)나라 책 속에서 밝게 빛이 났다.

할아버지는 장(璋)으로서 백제 국왕이었는데, 온화하고 겸손함에 맑고 빼어났으며 도량과 학문에는 따를 자가 없었으니,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당 태종이 조(詔)를 내려 개봉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을 수여하였다.

아버지는 의자(義慈)로서 현경(顯慶) 연간(656~660)에 당 고종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수여하였으니, 과단성있고 침착하고 사려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높았다. 고가(藁街)로 달려가 교화를 받으니 그 업적이 후세의 왕들에게 나타났고, 대리시(大理寺)에 올라 영화를 얻으니 그 경사스러움이 후손에게 흘러넘쳤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 : 백제와 고구려)에 드날렸다. 효성스러움으로써 본성을 이루었고, 신중함으로써 몸을 닦았다. 선한 것을 택하여 행하였고, 의로운 것을 들으면 능히 이를 본받았다.

그러하니 여몽(呂蒙)과 위의(衛顗)를 스승으로 삼지 않았어도 … 그 학식을 부끄러워 하였고,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여섯 가지 기묘한 계책이 잠깐 사이에 나왔다.


현경(顯慶) 연간(656~660) 당시에 황제의 군사가 백제를 정벌하였으니, 공은 멀리 천인(天人 : 천자)을 거울로 삼아 거역과 순종의 길을 깊이 깨달았다.

훌륭한 학덕을 받들어 신명을 바쳤고, 오랑캐의 풍속을 버리고 어진 데로 돌아갔으니, 후세 사람들의 재앙을 없앴고, 선인들이 미혹에 빠진 잘못을 고칠 수 있었다. 공의 정성이 천자에 계속 다다르자 포상이 거듭 내려졌으니, 마침내 그 지위는 경(卿)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영광은 번국(藩國)을 꿰뚫게 되었다.

그러나 마한(馬韓)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요해(遼海) 바닷가에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펼쳤으며, 환산(丸山) 지역에서 개미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하여 천자의 병사가 위엄을 발하였으니, 상장군(上將軍)은 지휘의 깃발을 옹위하였고, 정예의 중군(中軍)은 군률(軍律)을 받들었다.

이들을 병탄하는 꾀는 비록 조정의 계책에 따르는 것이지만 백성을 위무하는 방책은 사람의 덕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에 공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고 백제군공(百濟郡公)에 봉하였으며, 이어서 웅진도총관(熊津道摠管)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安撫大使)로 삼았다.

공은 신의와 용감성을 일찍부터 길러왔고, 위엄과 포용력이 본디부터 충만하였으니, 읍락들을 불러 회유하매 흘린 것을 소중하게 줍듯이 하였고, 간악한 무리를 섬멸하매 뜨거운
물에 눈녹듯이 하였다. 이윽고 천자의 밝은 조서를 받들어 신라와 수호하게 되었고, 갑자기 크나큰 은혜를 입어 동악(東岳)에서 천자를 모시게 되었다.

공훈을 여러 차례 쌓아 총애하는 칙명이 날로 융성해졌으니, 태상경(太常卿)으로 벼슬을 옮겼고, 대방군(帶方郡)의 왕(王)에 봉해졌다. 공은 임금을 섬기매 온 힘을 다하였고, 절개를 지키매 사사로움을 잊었으니, 누누히 정성스러움을 바쳐 마침내 숙위(宿衛)할 수 있게 되었다.


진(秦)나라 황실에 비교하면 유여(由余)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양할 것이고, 한나라 왕조에 견주면 김일제(金日磾)가 자신의 덕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비록 인정을 두터이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언제나 삼가하려 하였으나, 병환이 생겨 침술과 약이 효험이 없었고, 계곡에 견고하게 숨겨진 배가 모르는 사이에 옮겨지듯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공의 나이는 68세로서 사제(私第)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내렸다.

공은 굳세고 성실한 지조를 세웠고, 신중하고 정직한 몸가짐을 지녔으며, 고상한 정취에 홀로 이르렀고, 원대한 도량으로 아무 속박도 받지 않았다. 문사(文詞)를 고상하게 좋아하였고 경적(經籍)을 더욱 탐하였으니, 현명한 사람을 사모하되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명성에 대해서는 마치 떠도는 티끌에 견주었다.

그러나 하늘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여기에 모두 슬퍼하노라. 영순(永淳) 원년(682) 임오년(壬午年) 12(11)월 24일 계유일(癸酉(癸丑日)에 낙양(洛陽) 북망(北茫) 청선리(淸善里)에 장례를 치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유사(有司)로서 직임을 맡아 감히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바다 한 귀퉁이에서 겨레를 이루니 하백(河伯)의 자손으로서 상서러움을 드러냈고, 나라 기틀을 우뚝 세우니 국운이 멀리 이어져 내려왔도다. 집안의 명성을 능히 계승하고 대대로 이어받은 국업(國業)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은덕이 사수(泗水)에 흘러넘쳤고 위엄이 대방(帶方)에 발하였구나.

조상들이 쌓은 선행이 외롭지 않아 영민한 후손들이 줄을 이었으니, 곧고 성실한 마음을 꼭 지켰고, 충성스럽고 용감한 마음을 항상 가졌도다. 나라를 위해 몸바쳐 자신의 몸은 가벼이 여겼고, 나라 걱정에 집안 일을 잊고 의로움을 중시하였으니, 왕회편(王會篇)에 기록된 법을 준수하여 마침내 천자의 은총을 받게 되었구나.

처음에 계루(桂婁)가 어지러워지고, 요하(遼河)가 평안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마침내 어린 백성들을 이끌어 천자의 위광에 의지하였도다. 신의를 법도로 삼고, 어진 것을 도리로 삼아, 변방의 요새에서 교화를 펼쳤고, 운운산(云云山)과 정정산(亭亭山)에서 천자를 모셨구나.

봉작(封爵)으로는 5등작(等爵)을 뛰어넘었고, 반열(班列)로는 9경(卿)에 동참하여, 천자를 삼가 받들었고, 신하로서 절조를 엄숙히 지켰도다. 그러나 남산(南山)은 견고하지 못하였고, 흐르는 물이 갑자기 모여 내를 이루듯 세월이 흘러갔으니, 감히 명정(銘旌)에 의탁하여 삼가 크나큰 공적을 밝혀두노라.

대당(大唐)의 고인(故人) 광록대부(光祿大夫), 행태상경(行太常卿), 사지절(使持節),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군(扶餘君) 묘지(墓誌).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 『(譯註)韓國古代金石文, 제1-3권』(서울 :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참조.

(해설)
이 비는 1920년 중국 낙양(洛陽)의 북망(北邙)에서 출토된 것으로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하남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토된 지점이 아마 이 묘지에서 말하는 북망 청선리(淸善里)일 것이다.

탁본의 크기는 가로, 세로 모두 58cm이다. 글자는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사각형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하나씩 새겼는데, 1행마다 27자씩 26행으로 모두 669자로 되어 있다. 글씨체는 해서가 중심이 되고 예서가 일부 섞여 있다.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드러나 있지 않다. 또한 표제어가 앞에 있지 않고 뒤에 붙어 있는 특징이 있다.

부여융은 의자왕(義慈王)의 아들로서 그의 행적은『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일본서기(日本書紀)』, 『삼국사기(三國史記)』,「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등에 단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묘지명이 발견됨으로써 문헌에 누락된 것을 보충하고,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구당서』백제전,『신당서』백제전 및『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그가 백제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 옛 땅에 머물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비문을 통하여 낙양으로 돌아가 사망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백제가 멸망기까지에도 고구려와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명문에서 백제 왕실을 하손(河孫)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하백(河伯)의 자손’ 또는 ‘외손’이란 뜻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서문 첫머리의 판독되지 않은 부분에도 하백의 자손이란 표현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온조가 주몽(朱蒙)의 아들이라는 건국신화와 관련된 것이다. 역시 명문에 나오는 사수(㴲水)도 고구려 주몽신화에 나오는 엄사수(淹㴲水)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합하여 ‘양맥(兩貊)’이라 표현한 것이라든가, “계루(桂婁)가 어지러워지고 요하(遼河)가 평안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표현에서도 그러한 고구려와의 일체 의식을 느끼게 한다.

이밖에 부여융을 진조인(辰朝人) 즉 백제 이전에 존재하였던 진국인(辰國人)으로 서술한 것은 백제인들의 진국 계승 관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묘지와 문헌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부여융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
무왕(武王) 16년(615): 의자왕(義慈王)의 셋째 아들로 탄생.
의자왕 4년(644): 태자(太子)로 책봉됨
당(唐) 현경(顯慶) 5년(660): 백제가 멸망하자 의자왕 등과 함께 당나라 서울로 압송됨. 같은 해, 의자왕이 죽은 뒤, 부여융에게 사농경(司農卿)을 제수함.

용삭(龍朔) 2년(662) 7월: 수군(水軍) 및 군량선을 이끌고 복신(福信), 부여풍(扶餘豊) 등이 부흥운동을 벌이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함. 이들을 평정한 뒤 당으로 돌아감.
인덕(麟德) 2년(665): 웅진도독(熊津都督), 백제군공(百濟郡公), 웅진도총관(熊津道摠管) 겸 마한도 안무대사(馬韓道安撫大使)로 임명되어 웅진성으로 부임.
같은 해 8월: 유인궤(劉仁軌)의 주선으로 웅진성 취리산(就利山)에서 신라 문무왕과 화친을 맺는 의식에 참여함. 유인궤가 귀국한 뒤 신라의 압박을 받아 당으로 돌아감.

의봉(儀鳳) 2년(677) 2월: 부여융을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임명하여, 백제 옛 땅에 돌아가 유민을 안무하도록 하였으나, 신라가 이미 차지하고 있어서 결국 돌아가지 못함(『구당서』 권5도 참조).
영순(永淳) 원년(元年)(682): 68세를 일기로 집에서 사망하자 조정에서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내림. 같은 해 12(?)月 24日: 낙양(洛陽)의 북망(北芒) 청선리(淸善里)에 장례지냄.

이 묘지의 판독문은 여러 군데 소개되어 있는데, 서로 다른 부분이 약간씩 보인다. 이곳에 제시한 것은 이들을 서로 비교하여 정리한 대만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역사어언연구소(歷史語言硏究所)의 판독문이다.

[송기호교수]

원본 기사 보기:hinews.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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